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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제국의 금화…대한제국 화폐의 슬픈 역사





광무(光武) 5년(1901년) 2월 12일, 고종황제가 칙령 제4호를 내렸다. ‘화폐조례’로 반포된 칙령의 골자는 금본위제도 도입. 본위(本位) 화폐를 금화로 정하고 20환과 10환, 5환의 3종을 뒀다. 보조 화폐인 은화는 반환과 20전 두 종류를 발행하고 백동화(白銅貨)와 적동화(赤銅貨)를 하위 화폐로 삼았다.

재위 38년째, 부친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에 나선 햇수로는 17년째. 이준 열사의 사위인 유자후가 발간한 ‘조선화폐고(1930)’에서 화폐전문가로 평가됐던 고종은 화폐개혁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신식화폐조례(1892), 신식화폐발행장정(1894) 등 수차례 화폐개혁안을 내놓고 은본위제도를 시행한 주체도 고종이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국사학)의 ‘고종황제 청문회’에 따르면 개혁 군주 고종은 통화제도의 안정 없이 근대화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화폐제도를 일신하려 애썼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실패다. 양질의 금광이 많았으나 외국인에게 채굴권을 넘겨버린 터. 금본위제도 시행의 기본 자산인 금(金)이 없었다. 인하대 오두환 교수(경제학)의 ‘한국 근대 화폐사’에 고종의 화폐개혁이 실패하는 대목이 자세히 나온다. 대한제국은 우선 전환국에 인쇄과를 설치해 지폐 발행을 준비하는 한편 재원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해관세(海關稅·관세)를 담보로 프랑스 회사로부터 500만환을 빌리는 차관계약(1901년 4월)도 맺었다.

대내외 준비에도 화폐개혁과 차관 도입에 실패한 이유는 일본의 끈질긴 방해 공작 탓이다. 대한제국이 미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 돈을 빌리려 할 때마다 일본은 길목을 막았다. 결국 화폐조례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일본이 대한제국의 화폐개혁용 차관을 막은 이유는 자국 통화체제로의 편입이 방해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 대한제국의 화폐개혁을 무산시킨 일본은 다이이치은행(第一銀行)을 침투시켜 식민지용 불태환지폐인 제일은행권을 통용시켰다. 대한제국이 이를 거부하자 군함을 동원해 찍어눌렀다.



결국 대한제국은 금본위제도를 공포하고도 금화는 상징용 몇 점만 발행했을 뿐 악화(惡貨)인 백동화를 남발해댔다. 액면가는 2전 5푼이지만 제조원가는 5푼에 불과해 막대한 화폐주조차익을 남길 수 있는 백동화(白銅貨)를 마구 찍어댔다. 일본인들도 니켈과 간단한 압연기만 있으면 제조 가능한 백동화를 대량 위조해 물가 앙등을 거들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약과. 러일전쟁 승리를 확신한 일본은 1904년 8월 대한제국을 윽박질러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며 탁지부(재무부) 고문으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를 앉혀 재정에 관한 전권을 휘둘렀다. 재정고문 메가타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보다 더 한국을 수탈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정적으로 광무 5년(1905년) 7월부터 시행된 화폐 정리(구권과 신권의 교환)는 조선의 상업을 마비시켰다. 화폐교환을 알리는 관보(官報)라야 달랑 30부였다. 일반 신문에도 화폐교환 소식이 실리긴 했지만 3,000부 남짓한 발행 부수로 영세상인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백동화 960만원과 엽전 432만원 등 1,442만원에 이르는 교환액의 90%는 일본과 청나라 상인들이 가져갔다. 새로운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조선의 상인들은 큰 손실을 입고 파산하고 말았다. 본격적인 식민지 수탈에 앞서 상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이다. 화폐 주권 상실은 경제 종속을 가속시키고 종국에는 한일병탄으로 이어졌다.

1896년부터 40년간 순금 80여톤을 채굴했다는 운산 금광산 등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실패로 종결된 115년 전의 대한제국의 금본위제도 시도는 옛날 얘기에 그치지 않는다. 경제는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으나 간교한 이웃 일본의 행태는 여전해 보인다. 망신스러운 대일 협상 결과를 놓고 자화자찬에 바쁜 우리네 정치인들도 못난 조상들과 닮은꼴이다. /권홍우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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